이사야 52장 7-10절
52:7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52:8 들을지어다 너의 파숫군들의 소리로다 그들이 소리를 높여 일제히 노래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시온으로 돌아오실 때에 그들의 눈이 마주 봄이로다
52:9 너 예루살렘의 황폐한 곳들아 기쁜 소리를 발하여 함께 노래할지어다 이는 여호와께서 그 백성을 위로하셨고 예루살렘을 구속하셨음이라
52:10 여호와께서 열방의 목전에서 그 거룩한 팔을 나타내셨으므로 모든 땅 끝까지도 우리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도다
마태복음1장 21-23절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1:22 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가라사대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지금 우리는 이천여 년 전 오늘, 유대의 베들레헴이라는 마을에서 한 아기의 태어나심을 축하하는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 아기의 이름을 예수라 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예수의 탄생을 저는 오늘 여러분과 함께 세 가지 의미로 음미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 눈앞에서 성취된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예언하셨던 말씀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7:14)
“주께서 시온으로 돌아오실 때에 오시는 그 모습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51;8) 라는 말씀들이 이루어졌고 더 가깝게는 마리아에게 약속되었던 가브리엘의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더욱이 미가서 5장 2절을 보면 예수께서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실 것이 이미 예언되었습니다. 에브라다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던 베들레헴은 다윗의 고향이며, ‘떡집’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떡 혹은 빵으로 상징된 의미는 선한 삶을 사는 사람의 마음, 즉 주님을 모시고 선을 이루는 교회를 뜻하는 것이라는 점을 미루어 볼 때, 아기 예수가 태어나실 곳은 우리의 선한 마음의 터전이라는 것을 알게 해줍니다.
믿지 않는 자에게는 신기한 일이요 이상한 일로 그치었고, 또 죄지은 자에게는 두려움으로 받아들여졌지만 성경에 쓰인 예언자들의 말씀과 천사의 말을 듣고 믿은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구원의 사실이 뚜렷하게 비취었다는 사실입니다. 마구간은 말들이 있는 곳 즉 주님의 성언에 대한 이해력이나 이해성을 표징 하는 것으로, 아기 예수가 말구유 즉 말 밥통에 놓여 진 것은, 주님의 진리가 사람의 이해를 통하여 우리에게 오실 것이라는 사실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서에 대한 배움이 없이, 또 성언에 대한 이해의 노력이 없이는 예수 탄생의 진정한 의미를 우리는 찾아 낼 수 없습니다. 다만 물질적 상혼에 이끌린 X-Mas만이 우리에게 있을 뿐이며, 그저 그 때를 기하여 카드를 보내며 아이들에게 선물보따리를 한아름씩 안겨준다는 싼타크로스의 흥미로운 이야기로 끝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진 마음을 지키며 키웠던 목자들과 진리를 찾아 하늘의 뜻을 살폈던 동방박사들에게만 천사가 나타나 주님 탄생을 알렸다는 성서의 말씀에서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 아기 예수의 탄생은 ‘임마누엘, 곧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구원의 기쁜 소식, Good News 곧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천사가 요셉에게 한 말 “아이의 이름을 예수라 하라. 그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라고 하는 희망의 좋은 소식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들이 기대하고 있는 Good News들은 어떤 것들입니까? 혹 우리가 기대하고 있는 것들이 2천 년 전 아기 예수가 이 땅에 태어나신 목적과 다른 것은 아닙니까? 우리가 지금 생각하고 있고, 예배드리는 하나님을 다른 하나님의 모습으로 만들어 놓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말씀이 육신을 입으셨다”고 요한복음서에는 아기 예수의 탄생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임하셨다는 말이 됩니다. 막연하고 모호하게 된 하느님 뜻을 확실하고 또렷하게 우리 눈앞에서 몸소 그려내 보여주시는 구원주의 자기희생의 계시가 바로 그것이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탄생은 죄에 빠진 육신적(corporal)이고 감관적인(sensual)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실 속량(redemption)의 거룩하신 능력의 임재입니다. 우리의 육신은 이민의 생활에 지치고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사회 풍토 속에서 메말라 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희망은 물질적인 것에 국한되어 가며, 우리의 희망은 가시적인 것 즉 눈에 보이고 손에 잡혀지는 것으로 한정이 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비단 우리만이 아니고, 우리들의 아이들 세대에서는 그 정도가 더욱 심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본주의 국가 체제인 이 미국의 물질적인 흙탕물결에 자신이나 가족들이 떠내려가지 않도록 경계해야 합니다.
기쁜 소식은 우리에게 바깥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늘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 땅에서는 주께서 기뻐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로다” 하는 천사들의 찬양이 바로 실감나야 된다는 것이지요.
셋째, 아기 예수의 탄생은 죽어가며 꺼져 가는 우리 영혼들에게 새로운 빛으로 임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생명의 불빛이 영원히 꺼지지 않고 우리 안에 머물도록 말입니다.
성탄절이 되면 우리는 많은 불빛을 보게 됩니다. 락카펠라 츄리의 불빛이 많은 관광객들의 발걸음을 이끌듯, 암흑한 이 세상의 빛으로 오신 아기 예수는 우리를 주님 진리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예수님 오실 당시 유대교회의 상태가, 말씀이 위화(falsify)되고, 장로들의 불신앙으로 그들 조상의 유전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중히 여겨지고, 탐심과 지배욕이 불필요한 율례들을 만들어 내어, 주님의 말씀을 알 수 없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생명자체인 말씀이 완전 상실된 죽음의 고비에 이르게 되었던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유대백성들이 삶에 대한 희망을 잃고, 죽음의 늪에 빠져 있을 당시에 진리의 밝은 빛으로서 오셨던 그 예수는, 오늘날 우리들에게 생활의 기쁨과 희망을 잃고, 반복되는 노동과 냉랭한 인간관계 등으로 삶의 지표를 찾지 못하고 표류하는 영혼들에게 성언의 속뜻을 밝히는 이해의 빛으로 오신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의 빛은 악한 것과 잘못된 것들을 비추어 바로 보게 하고 밝혀 보게 하는 진리의 빛입니다. 또 미움과 원망의 눈으로 비추이던 것들을 사랑과 이해의 눈으로 보이게 하는 사랑의 빛입니다.
사랑하는 예수인 여러분, 이번 성탄의 날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더 좀 새롭게 맞아보십시다.
1. 자신의 잘못을 비추는 진리의 빛으로서 받아 회개하며
2. 말씀에 순종하며 공부하는 생활로
3. 미움과 원망과 파괴보다는 사랑과 이해와 온유의 마음으로
4. 주어진 일에 충실하여 새로운 희망을 가꾸는 마음자세로 이 성탄을 맞아 보시기를 나신
아기에게 주어진 그 이름, 예수의 이름 받들어 축원 드립니다.
